SM 엔터테인먼트의 역사 1화: 이수만, 최초의 전문 기획사를 설립하다
SM 엔터테인먼트의 역사 1화: 이수만, 최초의 전문 기획사를 설립하다
2023년에 SM 엔터테인먼트가 카카오에게 매각되면서 대한민국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BIG 4 중 하나였던 SM 엔터테인먼트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카카오에서 SM을 독자적인 회사로 운영하기로 결정하면서 SM의 명맥이 찝찝하게나마 이어질 수 있게 되었다. 이번 매각을 통해 SM 엔터테인먼트의 SM이었던 이수만이 완전히 손을 놓게 되면서 사실 앞으로의 SM 엔터테인먼트는 지난 30년동안의 SM 엔터테인먼트와는 다른 길을 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비록 이수만이 SM 엔터테인먼트와 헤어지는 모양새가 썩 좋아보이지는 않았지만, KPOP이라는 장르의 기틀을 만들고 지난 30년간의 성장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하나가 이수만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수만과 SM 엔터테인먼트가 지난 30년동안 어떤 과정을 통해 현재까지 왔는지 자세하게 이야기해보려 한다.
1. 이수만, 연예인 최초의 미국 석사 (1985년 ~ 1989년)
1981년 미국으로 유학을 간 이수만은, 컴퓨터 공학을 배우러 간 것이었지만 유학 초기 MTV의 개국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고, 유학생활 내내 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한국에 적용 시킬 궁리를 하고 있었다. 때문에 대학원 대학 시절, 미국의 대기업에 입사 제의까지 받지만, 한국으로 돌아가 음악을 할 결심을 한다. 그렇게 1985년 5월 17일, 캘리포니아 주립 노스리지 대학교에서 졸업을 하게 되고, 한국 연예인 최초로 미국 대학 석사 출신이 된 이수만은 바로 한국으로 귀국해 새로운 출발을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사실 81년에 미국으로 떠나면서 다시는 연예계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인터뷰 했던 이수만이었지만, 미국에서의 큰 경험은 다시금 그를 연예계로 돌려놓게 된다. 그렇게 귀국한 이수만은 우선 한국 연예계의 근황을 전유성을 통해 들으면서 조금씩 자신만의 비즈니스를 준비해간다. 이수만은 자금줄을 위해 인천의 월미도에 헤밍웨이라는 레스토랑을 여는 것을 시작으로, 85년도 대학가요제의 MC를 보는 등 여러가지 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의 프로덕션 시스템에서 영감을 얻은 이수만은,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지만 우선은 자신의 본질인 음악에서 출발 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1986년, 레스토랑 사업과 방송일이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유학 생활 동안 생겼던 부채를 청산하기 시작한 이수만은, 전자 음악을 할 수 있을만한 사람을 수소문하게 되는데, 우선은 음악을 좋아하는 컴퓨터 괴짜로 불리는 곽영준을 만나고 그를 통해서 한동안 SM의 기둥이 되어줄 홍종화를 만나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심취한 홍종화는 고등학교 때 신디사이저를 구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에 열을 올리게 되었고, 이는 그를 음대 진학으로 이끌게 되었다. 특히 그는 일본 음악, 그 중에서도 토미타 이사오와 사카모토 류이치에게 영감을 많이 받았고, 그 영향 덕에 국내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전자악기를 경험해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연주자들 사이에서 유명해진 홍종화는 한 때 지금은 천둥호랑이 창법으로 많이 알려진 권인하와 함께 "우리" 라는 밴드로 활동을 하기도 한다. 얼마간의 활동 후, 1986년, 홍종화는 MBC의 <지구촌의 한국인>이라는 다큐멘터리의 음악 작업을 맡게 되는데, 이 시기에 이수만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당시 홍종화는 MBC의 장고웅에게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고, 계약을 맺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이수만이 더 흥미로운 제안을 하게 되면서 홍종화는 MBC가 아닌 이수만을 택하게 된 것이었다. 이수만의 입장에서는 컴퓨터와 음악 그리고 미디에 대한 조예가 깊은 사람을 다시는 만나기 힘들다는 확신이 있었고, 홍종화 역시 고리타분한 MBC와 일하는 것 보다는 더 젊고 경험이 많으며 시야가 트인 이수만과 일하는 쪽이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수만, 곽영준 그리고 홍종화는 대한민국 최초의 컴퓨터 밴드인 CPU를 창단하게 된다. CPU는 큰 족적을 남기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컴퓨터 음악을 최초로 시도한 의미 있는 그룹이었다. 특히 신디사이저와 미디를 이용한 작곡법과 샘플링 기법의 출현은 말 그대로 시도를 앞서가는 것이었다.
*미디 기술은 1982년 경, 미국과 일본에서 개발된 기술로 1986년경에 홍종화가 사용하고 있었던 것은 당시로써는 굉장한 일이었다.
홍종화를 영입하면서 조금씩 구색을 맞춰간 이수만은 1986년, 홍종화가 전곡 작업한 앨범 <끝이 없는 순간>(1986)을 발매하고, 1989년, 국내 최초의 뉴에이지 장르의 앨범을 발매한다. 이는 재즈의 전설인 허비 행콕의 영향을 받은 것이 컸는데, 재즈를 비롯한 블랙 뮤직이 트렌디한 뉴 잭 스윙이나 힙합으로 가는 길목에 뉴에이지가 있다고 여겼고, 그래서 뉴에이지를 먼저 대중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본인의 앨범 <뉴에이지>(1989)는 대중에게 크게 어필하지 못했고, 결국 이수만이 뉴에이지 음악을 보여주려 했던 밴드 CPU나 <뉴에이지 1>, <뉴에이지 2> 앨범들은 사실상 실패에 가까운 결과만 내고 끝이났다. 방송 활동과 음박 작업 등으로 건강이 악화된 이수만은, 새로운 길을 걷기 위해 한동안 방송을 전부 접게 된다.
2. SM 기획 설립 (1989년)
1980년대의 끝물, 대중가요를 주름잡고 있던 것은 이문세와 변진섭을 비롯한 발라더들과 김완선, 박남정을 필두로 한 댄스 가수들이었다. 이수만은 김완선에게 굉장한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바로 김완선이 데뷔하기까지 겪었던 육성 시스템 때문이었다. 14세의 나이에 이모 한백희를 따라 연습생으로 시작한 김완선은, 3년간 리듬터치의 멤버로 여러가지 트레이닝을 받고, 백업댄서 경험을 한 후에 거의 완벽에 가까운 모습으로 데뷔했다. 가수보다는 제작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이수만은 이러한 한백희의 노하우 외에도 미국의 모리스 스타의 행보에 주목했다. 모리스 스타는 70년대부터 뉴 에디션이나 뉴 키즈 온 더 블록 같은 그룹들을 만들어온 프로듀서였는데, 처음에는 큰 성과를 보이지는 못했지만 시간이 갈 수록 뉴에디션 출신의 바비 브라운이 성공을 거두고, 뉴 키즈 온 더 블록이 성공을 거두면서 그 두각을 나타냈다. 이를 보면서 이수만 역시 제작자의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이수만이 제작을 결심하면서 선택한 장르는 블랙 뮤직, 그것도 힙합과 뉴 잭 스윙이었다. 현지에서는 이미 한물 간 장르였던 뉴에이지와는 달리 힙합과 뉴 잭 스윙은 갓 궤도에 올라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장르였고, 그런 외국 음악들이 여러 매채를 통해 한국에 흘러 들어오면서 이미 매니아층을 어느정도 형성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비디오 시대에, 세계적인 트렌드였던 블랙뮤직과 댄스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슈퍼스타가 생기는 창구로 여긴 이수만은 그러한 것들을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로 한다.
그렇게 캐스팅을 위해 이수만이 영입하게 된 사람이 최진열인데, 최진열은 1980년대 명동이나 이태원에서 DJ를 하면서 이미 국내 굴지의 댄서들과 인맥을 트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이태원의 클럽에서 DJ를 하던 최진열을 찾아간 이수만은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고는 방송 담당 매니저로 합류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최진열에게 이수만은 흑인 음악을 할 수 있는 인재를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1989년, 최진열은 자신이 알고있던 최고의 댄서인 이주노를 찾아가 캐스팅을 하게 되었는데, 이주노는 당시 오복과 오복성 활동중이었기 때문에 팀을 배신할 수 없어 고사하게 되었고, 이주노가 현진영이라는 친구를 소개해주게 된다. 현진영의 춤실력을 어느정도 알게 된 이수만과 최진열은 현진영에게 공식적으로 오디션을 볼 것을 제안한다. 그렇게 대방동의 임시 스튜디오에서 현진영의 오디션을 보게 되었고, 춤 오디션과 노래 오디션(현진영은 오디션 곡을 조하문의 "내 아픔 아는 당신께"(1989)로 기억하지만 최진열 말로는 진미령의 "아하"(1989)로 봤다고 한다)을 통해 현진영을 오디션에 합격 시킨다.
*현진영은 본인의 유튜브에서 이주노와 본인 둘 다 오디션을 봤고, 이수만이 "목소리에 흑인의 쇳소리가 있다"며 본인을 선택했다고 하지만, 이주노 그리고 최진열의 회고록을 참고해보면 이주노가 상황 상 캐스팅을 고사한 이야기가 더 자연스럽다.
이수만은 귀국 후, 최신 시스템의 스튜디오를 제작하려고 항상 생각하고 있었지만, 금전적인 부분 때문에 한동안은 대방동에 임시 스튜디오를 두고 있었지만, 현진영을 캐스팅한 뒤, 본격적으로 SM기획을 설립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어느정도 경제적으로 안정이 된 이수만은 최신 설비가 들어간 스튜디오를 차릴 준비를 하는데, 마땅한 건물을 찾지 못하던 와중에 홍종화 아버지의 도움으로 송파구 석천동의 한 4층 건물을 찾게 되었고, 이수만은 지하 1층은 스튜디오, 1층은 사무실, 2층은 멤버들을 위한 휴식 공간 그리고 4층은 본인을 위한 주거 공간으로 삼게 된다. 이수만은 스튜디오의 설계와 인테리어를 모두 감독할 정도로 애정을 쏟은 것이었다. 그렇게 사무실/스튜디오가 완성되고, 이수만은 SM 기획을 출범하게 된다.
3. SM 기획 1호 가수, 현진영과 와와 (1990년)
현진영을 캐스팅한 SM은 약 1년간의 준비 기간을 갖고 현진영에게 혹독한 트레이닝을 시키게 된다. 우선 경희대학교에서 성악 기초 수업을 들으면서 홍종화에게 갖가지 노래 트레이닝(물구나무를 서서 노래를 하는 등, 여러 환경에서도 지치지 않고 노래를 할 수 있는 트레이닝을 받았는데, 이는 현진영이 후에 이어받아 여러 가수들을 트레이닝 하게 된다)을 받았고, 춤 실력의 향상을 위해서 당시 이태원의 한 클럽인 소울트레인에 출입을 시켰다. 故서치훈이 운영하던 소울트레인은 미군들이 주로 출입하던 외국인 전용 클럽이었는데, 클럽의 DJ가 블랙뮤직을 많이 트는 덕분에 여러 미군 댄서들이 출입했고 그 중에서도 미군 중에서 가장 춤이 뛰어났던 Damon William이 다닌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현진영이 더 리얼한 흑인 댄서의 느낌을 갖기를 원했던 이수만은 서치훈과 이야기를 나눠 현진영만 특별하게 클럽에 출입을 시켰다.
*1989년, 소울트레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길 건너편의 문나이트로 확장이전하게 된다.
현진영의 실력이 어느정도 무르익었을 무렵, 이수만은 현진영에게도 바비 브라운처럼 두 명의 백업 댄서들을 붙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캐스팅을 위해 이태원의 여인도시라는 클럽에서 댄스 경연대회를 열게 된다. 우선 월말대회를 통해 본선 진출자를 뽑고 최종적으로 연말대회에서 우승한 팀이 우승하는 시스템으로 진행이 되었는데, 김성재와 이현도의 연락을 받은 강원래와 구준엽이 월말대회에 참가해 각각 1등과 3등을 하게 되면서 월간 대회에 진출하게 되었다(당시 심사위원은 김창환). 그 후, 연말 대회에서 강원래와 구준엽은 팀을 이루어서 참가를 하게 되었고, 미애와 유영진의 팀을 상대로 승리하면서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연말 대회의 MC는 SM 소속의 김승현이었고, 최진열이 심사위원 중 하나였으며, 현진영 역시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이 대회에서 강원래와 구준엽이 이주노, 양현석을 만나 이겼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해당 이야기는 다른 대회의 이야기이다.
춤 실력이나, 시원시원한 기럭지, 그리고 패션 등을 봤을 때 너무나도 잘 맞는 조각이 될 거 같다는 생각에 SM기획은 강원래와 구준엽에게 백업 댄서 역할을 제안하게 되었고, 당시 군휴학 중이었던 강원래와 구준엽은 일반적인 백업 댄서보다는 큰 역할을 한다는 조건으로 합류를 하게 된다. 그렇게 댄스팀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와와라는 이름을 짓게 된 것을 시작으로, 강원래와 구준엽은 안무 제작은 물론, 앨범 자켓 디자인 등의 역할도 맡아서 하게 된다. 이 둘이 백업 댄서를 하게 된 데에는 현진영의 춤 실력도 큰 역할을 했는데, 현진영은 못 추는 춤이 없을 정도로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었고, 스킬적인 면에서도 누구보다 뛰어났다고 한다(다이렉트 헤드스핀을 12바퀴를 돌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선천적으로 짧은 기럭지 때문에 그렇게 멋있지는 않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현진영은 워낙 거칠게 살아온 이력이 있었던 만큼 여러 문제아 기질을 보였는데, 숙소를 탈출하고 새벽에 놀러다닌다던가 하는 일들이 잦았다고 한다. 그런 현진영을 관리하기 위해 이수만은 거의 반 감금 상태로 현진영을 케어했고, 일반적인 매너나 예절 교육도 직접 도맡아서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문나이트에서 이주노를 만난 현진영이 이주노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이 생겼는데, 이주노가 이에 대한 복수로 로저래빗 춤을 박남정과 프렌즈에서 먼저 선보이는 일이 생겨버린다. 물론 단순한 복수심이라기 보다는, 로저래빗 춤이 세계적인 트렌드가 되어버린 상태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SM과 이수만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이었고, 그들은 오리지널리티를 보여주기 위해 토끼춤이라는 한국식 명칭을 지으면서 토끼춤의 원조는 현진영이라는 명분을 만들게 된다.
그렇게 오랜 준비 끝에 1990년 4월, 데뷔곡 "야한여자" (1990)가 수록된 싱글 앨범을 선행으로 발매하고 반응을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 1990년 초여름, 이미 이수만이 연예계에 물건을 내놓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어느정도 반응이 있음을 느낀 이수만은 같은 해 6월 19일, KBS의 《스타탄생》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현진영과 와와를 데뷔시킨다. 대한민국 최초로 헤드셋형 마이크를 착용하고, 바비 브라운이나 MC 해머와 비슷한 승마복 차림에 두 명의 댄서를 둔 현진영은 방송가에 연줄이 있던 이수만 덕분에 시작부터 메이저 프로그램에서 커리어를 시작하지만 처음부터 큰 반응을 일으키지는 못한다. 하지만 8월에 정규 1집 <New Dance vol. 1> (1990.08.01)이 나오면서 후속곡인 "슬픈 마네킹"이 반응을 얻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요톱10》에서 3위에 오르는 기염을 터뜨리며, 비디오 시대를 이끌어갈 가수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2화에서 계속됩니다.
최종 편집일: 2024년 08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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